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Nobody Knows, 2004)
2010년 배두나의 파격적인 노출 씬으로 화제를 모은 일본 영화 <공기인형>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알려진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번엔 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필자는 사실 <공기인형>을 보고나서는 그렇게 주목하지 않았던 감독인데, 우연히 접하게 된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선 영화를 좋아하는 저로선 사숙(私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영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른 일본영화 <러브레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비밀> 등과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자체는 필름 그레인이 묻어나면서 약간 예스럽고 채도가 낮은 화면과 파스텔 톤의 컬러를 주로 사용하여 뭔가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그런 영화들 말이죠. 일본영화는 50년대 이후로 거의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을 받지만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본 문학이 가지는 탈역사적이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다분하면서 뭔가 서정적 감수성이 풍부한 요소들을 갖춘 영화가 다수 제작되었고 이제는 그게 일본영화의 지배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3D영화니 풀HD니 하며 고해상도의 선명한 영상과 시청각적 볼거리를 강조하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에 비해 뭔가 B급으로 치부될 여지가 있지만 아마 그게 요즘 일본 영화를 자꾸 찾아보게 하는 매력이 아닐까 하네요. 넘치는 시청각적 홍수에서 일종의 오하시스와 같은 쉼터를 제공한달까요. 아무튼 <아무도 모른다>를 처음 접했을 때, 영화의 내러티브를 차치하고 영상에서 느낀 점은 그러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 때 일본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네 남매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는 이미 가여운 어린 소녀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실화를 알고 영화를 따라가게 되면 감독이 얼마나 대가인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카메라는 너무나도 비극적인 순간을 정말 지독스러울 정도로 감정을 절제하면서 일본의 평범한 사회의 골목골목을 누빕니다. 때문에 눈물이 나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불쌍하게 죽은 다섯 살 어린 소녀는 이 삭막한 세상을 떠나 더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가, 반드시 그래야한다는 분노로, 그리고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절제된 감정은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둑이 무너진 봇물처럼 범람합니다.
요즘은 드물지만 간혹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기만 하면서 눈물을 뽑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이른바 최루성 멜로드라마들과는 대조적입니다. 일부 관객들은 그토록 비극적인 실화를 어떻게 이토록 담담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만, 강한 파토스를 가진 인물들이 서정성과 만날 때 진짜 비극,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는 짙은 농도의 값진 눈물을 흘릴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를 보고나서 뒤늦게 놀란 사실은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문제작으로 늘 거론되곤 하는 <올드보이>와의 영화사적 궤적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이 거창하기는 합니다. 두 영화는 영화의 소재나, 분위기, 영상기법, 스타일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두 영화는 함께 2004년도 칸 영화제에 초청됩니다. 두 작품 모두 칸 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올드보이>는 작품성까지 인정받아 심사위원 대상까지 수상합니다. 이후 박찬욱 감독은 한국적 정서를 적절하게 서구적 정서와 혼합하고 또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해 나갑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한 것은 그해 남우주연상입니다. <올드보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주연배우 최민식의 연기가 있었기 때문임은 누가 봐도 분명합니다만, 그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은 <아무도 모른다>에게 돌아갔습니다. 역대 최연소 수상이라는 타이틀까지 가지면서 말이죠. 주인공을 맡았던 야기라 유야는 당시 나이가 만 14세였습니다. 남우주연상은 야기라 유야가 차지했지만 나머지 어린 동생들조차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다른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보면 그의 진면목을 더 확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과 버금가거나 능가할 정도의 디테일. 그런데 그런 디테일이 등장하는 모든 연기자들에게서 느껴집니다. 게다가 역시 나오는 세 아역배우의 디테일한 연기는 정말 무릎을 치게 할 정도입니다. <걸어도 걸어도>는 주인공의 고향 집에서 하룻밤 동안의 일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사실 내용이랄 것도 없는 하루 동안의 매우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한정된 공간 속에서 배우들이 하는 지극히 자잘한 대화나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마저도 의미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쯤 되면 배우의 역량을 넘어 연출의 수준이 장난이 아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의 경우는 일부 클로즈업이나 미디엄 숏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정된 앵글을 사용하며, <걸어도 걸어도>의 경우는 모든 숏들의 앵글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앵글은 관객의 시선입니다. 그 시선을 고정시킴으로 해서 관객들의 시선을 객관화시킬 수 있습니다. 감정을 절제하고 감독의 서정성과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극적 내러티브만을 통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관객은 더 이상 그 배우들에게 객관화되어 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합니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 제목처럼 되길 바라는 관객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제목마저도 끝내주지 않나요?
끝으로 사족입니다만 야기라 유야가 분한 아키라가 여름에도 입던 칠부 바지를 크리스마스에도 입고서 뛰어다닐 때, 정말 바지가 너무 사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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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머물다 간 빈자리는 어쩐지 낙엽이 진 빈 나뭇가지만 같아 쓸쓸한 늦가을녘이 떠오르네요.
대구 중구 봉덕동에 위치한 방천시장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에서 2011년 11월 중순 어느날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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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타이탄>이 개봉했을 때, 별다른 감흥 없이 보았는데
비슷한 류의 <신들의 전쟁>을 보고 나니 어쩐지 <타이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
본 포스트는 글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어차피 반전이 없는 영화니 상관 없을 듯 합니다.
타이탄(Clash Of The Titans, 2010)
- 신화의 영화적 재구성
신화는 분명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완성되지는 않았다. 신화는 최초로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구전되어오며 다듬어지고 재생산된 투박하고 거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들의 모티프가 되고 있고, 그것 또한 현대적 방식의 신화의 재생산이다. 신화는 그러한 방식으로 여전히 만들어지는 중이다.
페르세우스 신화
영화 <타이탄>은 그리스의 영웅 페르세우스의 모험을 그리고 있다. 모티프가 아니라 페르세우스 신화를 모조리 갖고 왔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상당부분 다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차이는 신화가 전승되는 과정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신화 속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와 다나에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자신의 딸 다나에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딸이 아이를 낳을 수 없게 아무도 만나지 못하도록 청동탑에 가두어 놓았다. 그러나 제우스가 청동탑에 갇혀 있는 아름다운 다나에를 보고 황금 소나기로 변신하여 청동탑으로 스며들어가 그녀와 동침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페르세우스다.
아크리시오스는 딸이 아들을 낳자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둘을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어보냈다. 다나에 모자는 세리포스 섬에서 어부 딕티스에 의해 거두어져 살게 된다. 딕티스의 형이자 세리포스의 왕이었던 폴리덱테스가 다나에에게 반해 그녀와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다자란 페르세우스 때문에 여의치 않자 그를 멀리 보내기 위한 꾀를 쓴다.
폴리덱테스에 의해 페르세우스는 고르곤 세 자메 중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러 세상의 끝이 오케아노스 저편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메두사의 눈을 보게 되면 모두 돌이 되기 때문에 여러 장비들이 필요했다. 그 장비를 갖고 있는 요정들을 찾기 위해 그라이아이라고 불리는 날 때부터 늙은 세 마녀를 찾아간다. 그들은 하나의 눈을 서로 돌려 쓰고 있었는데 페르세우스는 그 눈을 빼앗아 요정에게 가는 길을 알아낸다. 페르세우스는 요정에게서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는 데에 도움이 되는 날 수 있는 신발과 보이지 않게 해주는 마법 투구, 자른 머리를 넣을 마법 자루를 얻게 된다. 이과정에서 아테네의 도움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원래 메두사는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는데 메두사와 포세이돈과의 관계 때문에 아테네가 흉측한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마법 장비들이 헤르메스의 지물과 유사하여 헤르메스가 선물한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페르세우스는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목을 베고 자루에 담아 투구를 쓰고 날 수 있는 신발을 신고 도망을 친다. 이때 메두사는 포세이돈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목이 베이자 그 곳에서 포세이돈의 자식들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하나는 날개 달린 말 페가소스이고 하나는 크뤼사오르라는 이름의 작은 아이이다. 페가소스는 이후 벨레로폰이라는 영웅이 얻게 된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던 중 아이티오피아의 바닷가에서 괴물의 먹이로 묶여 있는 안드로메다를 구하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 캇시에페이아가 자신의 미모가 바다신의 딸들보다 낫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바다신의 노여움을 샀고 바다에서 괴물이 나타나 나라를 황폐화시켰는데 이를 달래기 위한 제물로 안드로메다가 바쳐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를 구하고 그녀와 결혼을 한다. 이후 세리포스 섬으로 돌아간 그는 폴리덱테스 일당을 메두사의 머리로 헤치운다.
아르고스로 돌아간 후 그가 장례식 경기에서 던진 원반이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맞아 결국 최초의 신탁이 이루어진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캇시에페이아 등은 별자리로 남아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꼭지는 페르세우스의 출생,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 일, 안드로메다의 구출 등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신화는 이본이 많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 각각의 꼭지들도 서로다른 이야기들이 하나의 영웅에게 모아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런만큼 신화는 서로 개연성 없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페르세우스의 출생과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 일이 별개의 이야기이며 안드로메다의 구출도 앞의 이야기와 인과성이 없다. 이처럼 각각의 꼭지들은 서로 다른 페르세우스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이야기들이며 따로 만들어져 하나로 합쳐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신화의 영화화
영화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매우 실험적인 영화가 아닌 이상 대부분 극영화를 일컫는다. 즉, 그리스비극을 기원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연극과 달리 영화만의 언어가 따로 있다. 무대라는 특정한 공간이 존재하는 연극과 필름이라는 특수한 매체를 사용한 종합예술인 영화의 언어가 같을 수는 없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를 통한 보여주기의 방식과 서사의 방식이 공존할 수 있는 특수한 매체이기도 하다. 즉 연극과 소설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
우리가 흔히 '극적이다'라고 할 때의 극은 '極'이 아니라 '劇'이다. 정도가 심하다라는 뜻의 '極'도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말이기는 하지만 '극적이다'라고 할 때의 극은 연극, 희극, 비극 할 때의 '劇'이다. 이 때의 극의 의미는 하나의 잘 짜여진 이야기가 독자나 관객에게 주는 효과와 관련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의 구조를 처음-중간-끝으로 설명하고 이를 좀더 세분하여 프라이타크의 경우 도입부-상승부-정점-하강부-파국으로 설명하였다. 이를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프로타고니스트(주동인물, 주인공)는 안타고니스트(반동인물)와의 갈등을 이러한 극적 구조 속에서 겪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다른 것들을 생성하며, 중간의 앞의 것으로 부터 생겨나며 그 다음의 존재의 조건이 되며, 끝은 앞의 것에 의해 필연적이며 그 다음은 없는 것이다. 즉 인과의 논리에 의해 잘 짜여진 구조 속에서 갈등은 점점 정점을 향해 치달아가고 결국에는 놀라움과 반전을 동반한 끝에 갈등의 해소 또는 파국에 다다른다. 독자 또는 관객은 이 과정에서 주인공에게 공감과 연민을 느끼며 공포를 느끼며 갈등이 해소되고 종말에 치달으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바로 이런 이유로 스포츠 경기에서 긴장감 속에 이루어지던 경기가 한치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다가 결국 반전과 함께 끝나면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인과성을 같고 있으면서도, 논리적으로 모순됨이 없이 놀라움을 주는 것, 바로 이것이 '극'적인 것이다.
좀 두서가 없는데 요약하자면 개연성과 인과성에 바탕을 둔 반전(놀라움)이다. 즉, 논리적이지만 뻔한 결말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신화를 영화화 하려고 했더니 신화는 그 자체로 잘짜여진 이야기가 아니다. 스케일은 마치 연대기처럼 방대하고 또 그 이야기들은 매우 산발적으로 순서가 뒤죽박죽이고, 그나마도 개연성이 부족하다. 고도의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에대한 지식이 없이는 그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지도 못한채 재미를 느끼기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신화는 영화가 되기 위해 어떤 의미에서든 각색을 필요로 한다. 현대적 취향에 맞게 각색되거나 극적 테두리 속으로 각색이 되거나...
<타이탄> 속 페르세우스 신화의 영화화
<타이탄> 속의 내용을 위에서 언급한 세 꼭지로 나누어서 신화와의 차이를 살펴보자.
페르세우스의 출생
신에게 반란을 한 아크리시오스 왕을 벌하기 위해 제우스는 아크리시오스를 변하여 그의 아내와 동침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크리시오스는 두 사람을 궤짝에 넣어 바다에 버린다. 이 과정에서 아크리시오스는 괴물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궤짝에서 페르세우스만 살아서 어느 섬에 도착한다. 처음부터 신탁은 없었고 신에게 반란한 아크리시오스가 제우스의 징벌로 아내를 잃고 페르세우스가 태어난다. 페르세우스는 훗날 제우스의 뜻대로 신과 인간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
신화와 다른 점은 이야기의 시작이 신들에 의해 규정된 인간의 운명이 아니라 신과 갈라선 인간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인간의 탐욕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고 신탁이라는 운명의 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의해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원래 다나에는 아크리시오스의 딸로 되어 있는데 영화에는 아내로 나오며, 다나에를 차지하기 위해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가 영화에는 아크리시오스로 변신한다. 그리고 다나에는 궤짝에서 죽는 것으로 나오는데 원래는 살아남아서 메두사를 찾아가는 원인이 된다. 아마도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아들의 노력은 신화적 세계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오뒷세이아에서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도 어머니 페넬로페를 다른 구혼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안드로메다의 구출
원래 신화에서는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고 나서 돌아오던 중 안드로메다를 구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약간 각색되어 안드로메다를 구출하기 위해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러 간다. 그래서 안드로메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한다. 페르세우스의 출생에서도 보았듯이 인간들은 신을 불신하고 있다. 특히 아르고스(여기서 아르고스는 일리아스에서 그리스인들의 지도자 아가멤논 왕이 다스리던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대체로 그리스 인들이 사는 전 지역에 대한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인들은 제우스의 신상을 부수기에 이른다. 오만한 케페우스 왕과 캇시에페이아 왕비는 급기야 안드로메다의 미모가 신보다 낫다고 말한다. 이에 신들은 분노하고 때마침 하데스가 이들에게 나타나 일식이 일어나면 크라켄을 보내어 아르고스를 파괴하겠다고 말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안드로메다를 바쳐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떠난다.
이때 그자리에 있던 페르세우스는 하데스에 의해 제우스의 아들인 것이 드러나고 이일을 해결하기위한 여정에 동참한다. 이때 신의 유혹을 거절하여 영생의 저주를 받았다는 이오가 등장해 페르세우스 일행을 도와준다. 페르세우스는 천신만고 끝에 메두사의 머리를 구해와 안드로메다를 구한다.
신화와의 차이는 안드로메다의 구출과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는 것이 인과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 자세히 다루고, 다음으로는 하데스의 개입이 있다. 원래 하데스는 페르세우스 신화와는 무관한데 매우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오는 원래 제우스가 사랑한 여인 중의 하나로 제우스가 이오에게 반해 구름으로 변해 그녀를 차지했는데 그때 헤라가 그것을 발견하고 나타나자 깜짝놀란 제우스가 그녀를 암소로 변하게 했다. 그리고 계속된 헤라의 의심 때문에 계속 소로 살아가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별다른 언급없이 신의 유혹을 뿌리친 벌로 영생의 저주를 받았다고만 나온다.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 일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처치한 일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인데 영화의 줄거리도 대부분 이 모험에 대한 것이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는데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자를 수 있도록 아테네가 도와주었고, 페르세우스는 나중에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네에게 준다. 그래서 그 유명한 아이기스가 탄생한다. 아테네의 상징이기도 한 아이기스는 원래 제우스가 아테네에게 준 방패인데, 어떤 경우에는 어깨에 걸치는 갑옷으로 나오기도 한다. 아테네는 메두사의 머리를 여기에 달아 매우 강력한 방어용 무기를 만들었다. 약 1000개의 목표물 탐지와 20여개의 목표물을 동시 타격할 수 있는 최신식 전함 이지스(aegis)함은 아이기스(aegis)의 영어식 발음이다.
아무튼 영화에서는 하데스에 의해 양아버지와 가족을 잃고 아르고스로 온 페르세우스가 하데스에 대한 자신의 복수와 안드로메다의 구출을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처음부터 메두사를 처치하러 가는 것은 아니고 크라켄을 처치할 방법을 물어보기 위해 그라이아이 마녀들에게 먼저 떠난다. 신화와는 달리 마치 <반지의 제왕>의 반지원정대처럼 동료들과 함께 떠난다. 드라코를 비롯하여 이상한(?) 정령까지 동행하면서 제법 그럴싸한 파티를 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제우스가 나타나 칼과 지하세계로 가는 뱃삯(금화)을 준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신이 아니고선 타본 적이 없다는(이오의 설명에 따르면) 페가소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하데스의 사주를 받은 아크리시오스와의 결투도 벌어진다. 결국 원하는 메두사의 머리를 갖고 페가소스를 타고 아르고스로 돌아온 페르세우스는 크라켄을 처치하고 안드로메다를 구출한다.
신화의 영화적 재구성
자 이렇게 세부적으로 각색된 세꼭지가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었는지 살펴볼 차례다. 이미 대부분 언급을 했지만 중요한 것은 신화에서는 서로 단절된 세 꼭지가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옴니버스식 구성이 아닌이상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인과성을 갖고 있어야한다. 그래야 영화가 되고 그래야 극적으로 잘 각색된 신화가 될 수 있으며, 신화가 구전되는 과정, 아직도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아무런 문제 없이 편입할 수 있다.
우선 문제의 발단은 신과 인간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찬 인간들 특히 아크리시오스 왕과 안드로메다의 아버지이자 아르고스의 왕이었던 케페우스는 제우스에 대항을 했다. 원래 아크리시오스는 신탁이 자신을 위협하므로 운명을 거스르려 했던 자일 뿐이고, 케페우스의 경우 아르고스의 왕도 아니었고 단지 왕비가 자신의 미모를 신과 견주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신에 대항하게 된 인간이란 배경 속에서 제우스는 페르세우스를 잉태시키는데 그가 곧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게 된다.
페르세우스의 모험은 이후 야기될 아르고스의 왕 케페우스의 신에 대한 오만함에 대한 처벌로부터 인간을 구하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서 프로타고니스트인 페르세우스의 대척점에서 절대 악으로서 기능하는 안타고니스트는 하데스이다. 원래 하데스는 페르세우스의 모험과 무관하다. 그런데 그가 등장한 이유는 우선 인간의 적으로 규정된 신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게다가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의 의지로 태어난 인물로 나중에는 제우스가 바라는 인간과 신의 (우호적)관계를 페르세우스의 본인의 의지로 만들어가게 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당장은 인간이 신을 믿지 않아 화가 난 제우스지만 결국엔 제우스는 인간의 편이다. 그러므로 절대악으로서의 인물이 필요했고, 그는 제우스와도 대적할 만한 신적인 존재여야 하므로 하데스가 선택된 것 같다. 하데스는 페르세우스가 처치해야할 최후의 적인 크라켄과 동조하는 인물인데 크라켄이 바다에서 해방될 때 자신의 힘도 강해진다. 그 옛날 티탄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세상을 셋으로 나누어 하늘은 제우스가 바다는 포세이돈이 지하는 하데스가 지상은 함께 다스리기로 했는데, 하데스는 자신이 속아서 지하를 다스리게 된 데에 앙심을 품고있었다. 그래서 이일을 계기로 크라켄을 불러내고 제우스를 응징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한편, 페르세우스는 하데스에 의해 죽은 양아버지의 복수와 안드로메다를 구출하기 위한 모험에 뛰어든다. 그는 제우스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그즈음 인간에게 널리 퍼져 있던 신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아니면 인본주의 때문인지 아무튼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인간임을 주장하며 인간의 힘으로 이 일을 해결하리라 마음먹는다. 제우스의 도움을 뿌리친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져있던 신의 능력이 점점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니다. 모험을 통해서, 그리고 동료들에 의해서 점점 발휘 된다. 페르세우스는 처음의 평범한 어부에서 점점 그리스(아르고스)를 구할 훌륭한 전사로, 영웅으로 거듭난다.
하데스는 아크리시오스왕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주고 페르세우스를 처치하도록 한다. 아크리시오스는 신을 넘어서려 했지만 신에게 이용당하고 만다. 그는 인간을 포기하고 신이 되고자한 것이었다. 그와 페르세우스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페르세우스는 인간이길 원했고 신을 이용했다. 아크리시오스는 페르세우스에게 패하면서 '넌 인간으로 남아라'라고 말한다.
<신들의 전쟁>과 <타이탄>
<신들의 전쟁>은 신화적 인물들을 빌려와 전혀 다른 내용을 만들었다. 즉 이야기는 새롭게 창작한 것이며 인물들만 빌려 온 것이다. 그러나 <타이탄>은 신화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골자는 그대로 둔 채로 서로 단절 된 이야기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에 잘 섞일 수 있도록 인과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모험이 끝까지 명백한 이유를 유지하기 위한 반동인물을 설정해 극적 긴장감을 유지시켰다. 그렇게해서 그의 출생과 함께 시작된 인간과 신의 대결구도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충분히 담아냈고, 진부하긴 하지만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절대악에 대한 승리라는 멜로드라마적 이야기 구조를 따르면서 페르세우스의 단절된 이야기들을 - 안드로메다 구출과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 일- 하나의 이야기 속에 담아 낼 수 있었다.
이 영화가 그렇게 성공적인 작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화와 연계해서 볼 때 제법 잘 갖추어진 이야기 구조와 형식을 갖고 있기는 하다.
그건 그렇고, 페르세우스는 왜 안드로메다를 그냥 두고 떠날까. 아마 작가가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두고 떠난 거랑 헷갈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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